고흥류씨 인물근현대
근현대
제목 근현대 인물
작성자 관리자 [2024-03-25 16:57:31]
읽음횟수 493
첨부파일
첨부된파일갯수 : 1
기본사진.png

류홍석(柳弘錫) 1841 (헌종 7) ~ ?

강원도 춘성(春城출신. 1895년 류인석(柳麟錫)과 함께 충북 제천(堤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한때 만주 봉천(奉天)에 피신하고 1897(광무 1)에 귀국진위대 특무(鎭衛隊特務민긍호(閔肯鎬), 이강년(李康 )과 함께 재기하려다가 실패했다다시 1천명의 의병을 일으켜 가평(加平)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다리에 부상을 입고 중국에 망명요동(遼東회인성(懷仁城)에서 병사했다.


류인석(柳麟錫) 1841 (헌종 7) ~ 1915

()는 여성(汝聖), ()는 의암(毅庵). 이항로(李恒老), 류중교(柳重교)의 문인. 1876(고종 13)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을 체결할 때 문하(門下)의 유학생들을 이끌고 상소하여 이를 반대 하였고, 1894(고종 31) 갑오경장(甲午更張이후 김홍집(金弘集)의 친일내각(親日內閣)이 조직되자 의병을 일으켜 충주(忠州), 제천(堤川등지에서 싸워 부패한 관리를 죽였으나 관군에 패전단양(丹陽)으로 퇴거했다.

관군의 감시를 피해 만주 회인현(懷仁縣)으로 망명하여 은신중고종의 유지(諭旨)로 한때 귀국했다가 1898(광무 2) 다시 만주에 갔다. 1909(융희 3) 블라디보스톡에서 13도 의군도총재(義軍都總栽)에 추대이상설(李相卨등과 두만강 연안으로 쳐들어 오려고 기도 했으나 일본의 외교적 절충으로 러시아관헌에 피체뒤에 석방되어 1910년 한일 합방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 했다.

봉천성 관전현(奉天省寬甸縣)에서 병사했다한말이 거유(巨儒)인 이항로의 학통(學統)을 계승한 학자로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류병우(柳秉禹) 1849 (헌종 15) ~ 1910 (융희 4)

()는 해사(海史). 전라도 정읍(井邑출신. 1906(광무 10) 김상기(金相璣), 김병균(金秉均등과 함께 하동(河東)에서 의병을 일으켜 백낙귀(白洛龜)를 대장으로 삼고 순천(順天)을 점령하했으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패퇴정읍으로 철수하여 재기를 꾀하다 체포되었다감옥에서 죄수 30여 인을 이끌고 탈옥일본 각 기관을 습격하다가 중상을 입고 다시 체포되어 4일 동안 단식 끝에 옥사했다.


류중권(柳重權) 1863 (철종 14) ~ 1919 

충남 천안(天安출신. 1911년 가재(家財)를 털어 천안에 흥호학교(興湖學校)를 설립했다. 3.1 운동 때 딸 관순(寬順)과 아우내(竝川)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하다가 일본관헌에게 아내와 함께 살해되었다.


류중화(柳重和()는 치복(致福). 1905(광무 9) 보호조약(保護條約)이 체결(締結)되자, 1906년 가산(家産)을 전부 팔아 병기(兵器)를 장만하고동지(同志) 80여 명을 모아 스스로 대장(大將)이 되어 친일파(親日派)인 일진회(一進會익산지회장(益山支會長)을 죽이고금마(金馬), 고산(高山주둔 일본 헌병대(日本憲兵隊)를 기습했다.

1908년 10월 은진왕성(恩津王城)골에서 왜병을 크게 무찔렀으나 이듬해 2월 첩자의 밀고(密告)로 체포되어 금마 헌병대(金馬憲兵隊)에서 죽었다.


류영선(柳永善) 1893 (고종 30) ~ 1961

()는 희경(橲卿), ()는 현곡(玄谷). 12세 때부터 성리학자(性理學者간재(艮齋전우(田愚)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배우고을사국치(乙巳國恥)로 정국이 어지럽자 스승을 떠나 서해절도(西海絶島)인 계화도(繼華島), 왕등도(王嶝島), 고군산(古群山등지에 은거(隱居), 20여년 간 학문의 진리(眞理)를 탐구하여 구 학통(學統)을 이어받아 특히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만년에 고향(故鄕)인 전북 고창 주곡리(全北高敞蛛谷里외화동(巍華洞백운산(白雲山)아래에 정사(精舍)를 건립(建立)하고 2만여 권의 책을 서장후진 교육(後進敎育)에 진력그 문도(門徒)가 천여명(千餘名)에 달했다고창 외화동(高敞巍華洞용암사(龍巖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류지성(柳志聖()는 명화(明化), ()는 수당(遂堂). 항일정신(抗日精神)이 강()한 한말(韓末때의 의사(義士)이다.


류관순(柳寬順) 1904 (광무 8) ~ 1930

중권(重權)의 딸충남 천안(天安출신. 1916년 이화학당(梨花學堂교비생으로 입학했으나 1919년 3.1운동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귀향고향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천안(天安)․연기(燕岐)․청주(淸州)․친천(鎭川등지의 학교교회를 방문하면서 시위운동(示威 運動)을 협의해다.

1919년 3월 1일 아오내(병川장터에서 수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행렬을 지휘하고 만세를 부르다가 진압차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공주(公州검사국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복심법원(覆審法院)에 항소하여 서울로 호송되었다. 7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옥주에서도 만세를 부르며 동지들을 격려하다가 옥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을 수여되었다.